본문 바로가기
Book

[호프만] 낭만주의와 계몽주의의 충돌에 서있던 한 사람, 모래 사나이 책 소개 후기

by 한스. 2026. 2. 28.
반응형

안녕하세요! 라보엠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인간을 닮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괴한 존재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그 서늘한 공포 말입니다. 오늘은 그 심리적 공포의 기원이자, 독일 낭만주의 문학의 정수로 불리는 E.T.A. 호프만의 단편 소설 『모래 사나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년 전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인공지능 시대를 예견한 듯한 이 놀라운 고전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반응형

ETA 호프만 - 밤 풍경

ETA 호프만 『모래 사나이』: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심연

호프만의 단편소설집 밤 풍경에 실려있는 이 소설은 어린 시절 '모래 사나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청년 나타나엘의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잠들지 않는 아이의 눈을 빼앗아간다는 전설 속 괴물-모래 사나이가 현실의 인물과 겹쳐지며, 주인공은 광기와 공포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저자는 나타나엘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성이 지배하던 시대에 인간 내면의 어둠과 환상이 어떻게 한 존재를 파멸시키는지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특히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이 소설을 통해 정의한 '두려운 낯설음(The Uncanny)' 개념은 이 작품을 읽는 핵심 열쇠입니다. 가장 익숙해야 할 대상이 낯설게 느껴질 때의 공포, 즉 '인간과 똑 닮은 인형'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이 소설 전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인물들이 상징하는 두 세계: 나타나엘클라라

소설 속 두 주인공, 나타나엘과 클라라는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두 개의 거대한 세계관을 상징합니다.

💠 나타나엘 (낭만주의): 그는 감정과 직관, 무의식의 힘을 믿는 인물입니다. 그에게 세상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과 운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관적인 느낌을 사실보다 우위에 두는 그의 태도는 전형적인 낭만주의자의 모습입니다.
💠 클라라 (계몽주의): 그녀의 이름은 '맑고 투명함'을 뜻합니다. 클라라는 나타나엘의 공포를 "네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며 이성적으로 분석합니다. 세상을 법칙과 논리로 설명하려는 계몽주의적 시각을 대변하죠.

이 두 사람의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는 모습은, 차가운 이성의 시대에 갈 곳을 잃은 뜨거운 감성의 비극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결국 나타나엘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성적인 클라라'를 떠나, 자신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혹은 들어주는 척하는) 인형 올림피아에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자동인형 올림피아: 나를 비추는 텅 빈 거울

나타나엘이 사랑에 빠진 올림피아는 사실 기계 장치로 만들어진 자동인형입니다. 그녀는 "아, 아!"라는 짧은 감탄사밖에 내뱉지 못하지만, 나타나엘은 그 고요함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매우 섬뜩한 통찰입니다. 나타나엘올림피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올림피아라는 '텅 빈 그릇'에 투영된 자기 자신의 환상을 사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스마트폰이나 AI 챗봇에게 위로를 얻는 방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요구에 무조건 동조해주는 대상을 향한 갈구는, 어쩌면 진정한 소통보다는 나만의 세계에 갇히고 싶은 인간의 고독한 욕망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HER 와 『프랑켄슈타인』: 200년 전의 예언

모래 사나이』를 읽으며 저는 영화 HER를 떠올렸습니다. 인공지능 사만다의 목소리에 매료되어 현실의 관계를 포기했던 테오도르는 200년 전 나타나엘의 현대판 변주곡처럼 보입니다. 실체가 없는 존재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붓고, 그 실체가 드러났을 때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습니다. 또한, 이 소설은 1818년에 발표된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과도 깊은 연결고리를 갖습니다. 두 작품 모두 인간이 이성(과학)의 힘으로 신의 영역인 '생명 창조'를 흉내 내려 할 때 발생하는 비극을 다룹니다. 호프만메리 셸리는 급격한 기술 발전을 목격하며 공통적으로 느꼈던 불안, 즉 "우리가 만든 피조물이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려냈습니다.

맺음말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진실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보고 싶은 환상입니까?" 주인공 나타나엘코폴라에게 산 망원경을 통해 세상을 보았을 때 그의 파멸이 시작되었듯, 우리 역시 편향된 렌즈를 통해 세상을 재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이성과 감성,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고전은 여전히 유효한 경고이자 다정한 위로입니다. 오늘 밤, 여러분의 '모래 사나이'는 무엇인지 한 번쯤 고민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때로는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법이니까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