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바깥 일기: 타인의 풍경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법
안녕하세요 라보엠입니다.
글쓰기 뉴스레터에서 에르노식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 나와 책을 찾아보게되었습니다. 에르노식 글쓰기란 "나의 가장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진실을, 감정을 쫙 뺀 차가운 문장으로 기록하여 사회적 통찰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스냅 사진을 찍듯이, 크로키를 그리듯 스쳐 지나가는 삶의 순간들에 감정을 넣지 않고 있는 그대로 써내려가는 것입니다. 처음 설명을 듣고 의아했었는데, 책을 읽고 나서 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글에서 감정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정을 덜어낸 '삶의 크로키', 그 지독한 정교함에 대하여
아니 에르노의 문장은 마치 차가운 렌즈로 찍은 사진 같습니다. 그녀는 전철 안의 소음, 슈퍼마켓 계산대의 무심한 풍경, 정육점에서 고기를 주문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관찰하며 그 어떤 감정적 수식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언뜻 보면 누구나 쓸 수 있을 것 같은 '쉬운 글'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을 덮을 때쯤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찰나의 순간을 크로키하듯 빠르게, 그러면서도 정교하게 묘사하는 일이 얼마나 지독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 작업인지를 말입니다.
글쓴이가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대신 담담하게 공간을 비워둘 때, 그 빈자리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 됩니다. 아니 에르노가 건조하고 밋밋하게 써 내려간 그 문장들 사이로 독자는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잊고 지냈던 자신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작가가 감정을 절제했기에, 오히려 독자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고 개인적인 감정의 파동을 느끼게 되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잊히는 모든 순간을 위한 스냅 사진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명의 타인을 스쳐 지나갑니다. 지하철 건너편에 앉은 사람의 피곤한 눈빛,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며 망설이는 손길들. 우리는 그 풍경들을 보는 즉시 망각의 영역으로 밀어 넣습니다. 하지만 에르노는 그 '지나치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낚아챕니다.
정육점에서 주문하는 사람들의 짧은 대화 속에는 그들이 살아온 세월과 계급, 그리고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에르노는 마치 스냅 사진을 찍듯 그 순간들을 적고, 또 적습니다. 그녀에게 글쓰기란 거창한 예술이 아니라, 사라져버릴 찰나의 진실을 기록하여 보존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모든 순간이 사실은 누군가의 삶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바깥 일기'는 조용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아는 우리 안에 있지 않다
이 책의 문을 여는 장 자크 루소의 문장은 이 작품의 영혼을 관통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오롯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
장 자크 루소
흔히 우리는 자아를 찾기 위해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에르노는 고개를 들어 '바깥'을 보라고 말합니다. 나를 둘러싼 생활, 내가 마주치는 사람들, 전철 안에서 느꼈던 미묘한 불쾌감이나 연민. 그 모든 외부와의 관계가 결국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조각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내면이나 정신은 내 속에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마주하는 그 접점에서 끊임없이 생성됩니다. 에르노의 일기가 자신의 마음이 아닌 '바깥 풍경'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감정을 담지 않았기에 영원히 살아나는 감정들
일상을 감정 없이 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한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두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날의 공기와 온도, 감정이 그대로 살아나듯, 에르노의 글쓰기도 이와 닮아 있습니다. 그녀가 감정을 활자에 가두지 않았기에, 그 글은 박제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 움직입니다.
글쓴이에게는 기록된 문장이 그날의 기억을 소환하는 매개체가 되고, 독자에게는 마치 그 현장에 함께 서 있는 듯한 현장감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독자마다 제각기 다른 삶의 궤적에 따라 저마다의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아니 에르노식 글쓰기가 지닌 강력한 힘이자, 그녀가 노벨 문학상을 거머쥔 이유일 것입니다.
맺음말: 다시, 바깥을 향하여
『바깥 일기』를 덮으며 저는 다시 한번 글쓰기의 본질을 생각합니다. 내 안의 소용돌이에 매몰되지 않고, 세상을 투명하게 바라보는 눈을 갖는 것. 그리고 그 찰나의 진실을 크로키하듯 성실하게 기록하는 것. 오늘 전철에서 마주친 이름 모를 사람의 표정 하나가 어쩌면 여러분의 오늘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조각일지도 모릅니다. 에르노처럼 우리도 잠시 멈춰 서서 우리를 둘러싼 '바깥'을 관찰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 풍경 속에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정한 나'의 모습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니까요.